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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16)성녀도 꼭두각시도 거부하며…‘공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부르짖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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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8 06:00 입력 2020.12.08 06: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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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점자로 된 문서를 읽는 헬렌 켈러.

점자로 된 문서를 읽는 헬렌 켈러.

생후 19개월에 청각과 시각 잃고
특수교육 전문가 설리번과 함께
점자 읽는 법과 말하는 법을 익혀
셰익스피어·마르크스 책들 섭렵
장애가 존재의 본질이 아님을 확인

“내 활동이 사회봉사나 시각장애에 국한될 때, 그들은 나를 현대의 기적이라고 과장되게 추켜세웠다. 그러나 내가 정치적인 현안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어조는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부도덕한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호의를 구걸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공정함을 원할 따름이다.”

1937년 7월, 57세의 헬렌 켈러는 식민지 조선을 방문했다. 경성, 평양, 대구에서 열린 강연회에 수천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강연회 입장권은 연일 매진되었다. 조선에 도착하기 전 일본에서도 헬렌 켈러는 크게 환영받았다.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아시아는 전운에 뒤덮였다. 그런 와중에도 헬렌 켈러의 강연회는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조선 사회를 향해 불행한 사람들에게 “교육을 주라!”고 호소했다.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각별한 당부도 덧붙였다. “여러분, 나는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도 여러 가지 아름다운 세계에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인간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극복할 사람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의 성장 과정을 언론은 “인류의 최대 기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헬렌 켈러가 과연 자신의 삶을 ‘기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기적을 기다린 적도, 믿은 적도 없었다.

1880년,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난 헬렌 켈러는 19개월이 되었을 때 뇌척수막염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청각과 시각을 잃게 된다. 어린 환자가 평생을 침묵과 암흑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며 의사들은 안타까워했지만, 상황을 다르게 파악한 사람이 있었다.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좋은 가정교사를 백방으로 찾아보자고 헬렌의 부모에게 권유했다. 특수교육 전문가인 앤 설리번이 적임자였다. 헬렌 켈러는 낯선 이의 등장에 화부터 냈다. 두려움도 컸다. 하지만 앤 설리번은 헬렌 켈러의 가능성을 믿었다.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앤 설리번 선생님과 헬렌 켈러는 우선 점자를 익힌 다음, 발음할 때 목이 진동하는 원리를 글자와 연결시켰다. 드디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벙어리가 아닙니다.” 헬렌 켈러는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 호기심도 많았다.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습득했다. 1900년 헬렌 켈러는 명문 래드클리프 대학교에 입학한다. “나는 앤 설리번 선생님과 함께 보스턴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새롭고 훌륭한 것을 배우고 있어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읽었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을 사랑했다. 철학 책들을 섭렵해 나갔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가 내 존재의 본질이 아님을 기쁘게 확인했다. 내 영원한 정신 어디에도 장애가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비롯해 사회 불평등 이론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문학 교수 찰스 타운센트 코플랜드는 “문장 흐름이 유려한” 헬렌 켈러를 주목했다. 글쓰기를 격려했다. “이제부터는 그저 저 자신으로, 저만의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을 글로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1903년 자서전 <나의 생애 이야기(The Story of My Life)>를 출간한다.

1888년 헬렌 켈러(왼쪽)와 앤 설리번.

1888년 헬렌 켈러(왼쪽)와 앤 설리번.

1903년 발간한 첫번째 자서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장애 극복 과정에만 관심
인종차별·여성 참정권 얘기하자
혐오발언 쏟아내며 비난하기도

1904년,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헬렌 켈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그녀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헬렌 켈러는 입술로 말하는 방법을 배워 강연회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간혹 자신의 장애 극복 과정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있었지만, 그 내용은 이미 책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노력하면 된다는 말처럼 하나마나 한 소리가 이 세상에 없다고(노력하면 된다는 말은 하나마나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연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 획득, 사형제 폐지, 전쟁 반대, 인종차별 철폐, 아동 노동 폐지, 장애인 권리 증진 등 사회 현안에 관해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명했다.

1909년, 헬렌 켈러는 매사추세츠주 사회당에 입당한다. “헬렌에게 지지하는 정당이 공화당 쪽인지 민주당 쪽인지 물었더니 헬렌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에요. 나는 시민 정부, 정치경제, 철학을 공부한 다음에 결정할 거예요.” 1893년 미국 최초의 비숙련노동자 산별노조인 전미철도노조를 설립한 유진 빅터 데브스는 1900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로 다섯 차례 출마했다. 헬렌 켈러는 유진 빅터 데브스를 공개 지지했다. 동시에 그녀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체계 일원화 시스템 구축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이 하층 노동계급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큰 충격에 빠진다. 그녀는 1911년 “시각장애의 사회적 원인”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 직종에 뛰어들어 산업재해로 시각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여성이 성매매를 하다가 매독으로 시각장애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평등한 사회계급 제도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기회를 박탈하거나 장애 여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질병과 사고를 일으키는 사회 구조부터 고쳐야 합니다.”

헬렌 켈러는 자신의 부모가 식견이 탁월한 전화기 발명가와 친분을 유지할 만큼의 사회적 지위와 인맥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무엇보다 앤 설리번 선생님을 가정교사로 모실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더라면 래드클리프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도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할 수도 없었음을 시인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은 개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헬렌 켈러는 자신의 성취를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냉철하게 분석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헬렌 켈러의 미래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헬렌 켈러는 사람들의 입술 모양을 읽어 말을 이해했다(영국 정치인 윌프레드 팔링과 함께 1919년).

헬렌 켈러는 사람들의 입술 모양을 읽어 말을 이해했다(영국 정치인 윌프레드 팔링과 함께 1919년).

사회당 입당해 노동계급 문제 직시
장애 일으키는 사회 구조를 지적
8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칭찬과 외압에 현혹되지 않으며
억압자 편의 권력과 줄기차게 싸워

1903년 발간한 첫 번째 자서전은 그녀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헬렌 켈러를 그만큼 “부자유스럽게” 했다. 강연 기획자들은 헬렌 켈러가 행사장에 “수수한 흰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기를 요구했다. 점자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야 할 때가 많았다. 헬렌 켈러의 말과 글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녀가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기록한 책이나 시집을 출간하겠다고 하면 반색을 하다가, 미국의 인종차별을 강도 높게 비판하거나 하루빨리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비난이 쇄도했다.

배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앤 설리번의 남편 존 앨버트 메이시에게 “나쁜 영향”을 받아 헬렌 켈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사회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는 헛소문이 나돌았다. 그녀는 “나를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대한다면 어떤 비판도 거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녀에게 무람없이 막말을 퍼붓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갔다. 헬렌 켈러는 1913년 출간한 <어둠 밖으로(Ouf of the Dark)>에서 인류애, 평화, 교육, 사회주의가 “자신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고 또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직접 밝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헬렌 켈러를 대학을 졸업한 “특별한 장애인”으로만 취급하고 싶어 했다.

특히, 그녀가 “전쟁과 가난이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제안했을 때, 가까운 친구들조차 매몰차게 반응했다. “비대중적인 정치 노선”을 걷는 헬렌 켈러에게 등을 돌리는 ‘벗’들도 있었다. 평생 우정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 헬렌 켈러는 “벗들과의 단절”을 매우 가슴 아파했다. 여론을 움직이려는 조짐도 나타났다.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그녀의 신체 장애를 비하하는 발언마저도 서슴지 않았다. 봉사와 자선의 범주 안에서 활동할 때만 헬렌 켈러는 안전했고 또 환영을 받았다. 헬렌 켈러가 정치색을 드러내자 그녀를 “성녀(聖女)”에서 “불구자”로 전락시키려는 사람들의 혐오 발언이 난무했다. 헬렌 켈러의 지력을 칭송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헬렌 켈러는 외압에 흔들리지 않았다. 더욱 적극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사실 “헬렌은 열두 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자, 헬렌 켈러는 전쟁 반대 파업을 호소했다. 1916년 1월 헬렌 켈러는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촉구했다. “전쟁을 지속시키는 모든 법과 제도에 맞서야 합니다. 파업합시다! 무기 제조를 저지해야 합니다. 파업합시다!”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헬렌 켈러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사찰을 지시했다. 노동운동과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수록 헬렌 켈러의 생활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강의는 물론이고 지면마저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그녀가 1919년 영화 출연을 결심한 것도 “돈에 쪼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영화 촬영은 즐거웠다. 헬렌 켈러는 영화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영화는 내 마음속에서 오래전부터 불타고 있던 용기의 메시지, 모든 사람이 더 밝고 더 행복하게 사는 미래의 메시지를 널리 퍼뜨리게 해줄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상황을 비관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집중력은 누구도 추종하기 어려웠다. “헬렌은 다른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소리에 끌려서 정신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없다. 우리가 보고 듣는 시간 동안 헬렌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녀는 대중문화의 파급력을 높이 평가했다. 1920년부터 1924년까지 유랑 극단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시각장애인은 “천재도, 괴물도, 바보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야망을 이룰 권리”가 있음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기차게 이야기했다.

헬렌 켈러는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호의와 칭찬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녀는 “억압자의 편에 선 권력” “무지” “무의식적 잔인함” “가난”과 지독하게 싸우면서, “다른 이가 고통받을 때 그 누구도 마음 편히 살 수 없는 시대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최선을 다했다. 헬렌 켈러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사랑, 행복, 즐거운 노동을 이야기하는 삶 그 자체를 꿈꾼다.” 헬렌 켈러처럼 공정함을 추구하는 여성 정치인들이 환영받을 때, 세상은 분명 좋아질 것이다. 그녀들의 건승을 기원한다.

■장영은

(16)성녀도 꼭두각시도 거부하며…‘공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부르짖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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