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제작가이드라인 개정 후
소수자 차별 방지대상 폭넓게 확대
전문가 “KBS, 다양성 조사·강화해
민영방송에도 긍정적 영향 주어야”
다큐 인사이트> ‘빛은 무지개’ 편. 예고 영상 갈무리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컬러풀한 세상을 흑백으로 보며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한국방송>(K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다큐 인사이트> 시청자소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일부다. 한 시청자가 5월13일 방영한 ‘빛은 무지개’ 편을 본 뒤에 쓴 글. 해당 편은 성소수자의 일상과 사랑, 차별 경험을 담담하게 다뤘다. 이 시청자는 소감글 제목란에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방송’이라고 썼다. ‘혐오성’ 청원도 등장했다. 지난달 13일 한국방송 시청자권익센터에는 “혈세로 게이, 레즈비언 옹호 그만하세요”라며 ‘빛은 무지개’ 편 방영 중단을 요청하는 청원이 게시됐다. 동의가 1994명에 달해 제작진이 답변에 나섰다. 서용하 시사교양2국 1시피(CP·책임피디)는 지난 2일 답변에서 “공영방송 케이비에스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공론장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며 “이번 다큐는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토론되고 존중받는 공론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되었다”고 밝혔다.
■ ‘소수자 차별 방지 강화’는 공영방송의 책무 전문가들은 공영방송으로서 한국방송이 다양성 확보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시청자와 직접 소통하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한국방송이 지난해 개정한 ‘방송제작 가이드라인’이 이러한 제작진의 노력을 조직적 차원에서 뒷받침하는 ‘근거’가 돼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지난해 한국방송은 “시청자의 높아진 인권의식을 반영”한다는 취지로, 소수자 차별 방지 대상을 기존 여성·장애인 등에 더해 이주민·성소수자 및 다양한 가족 형태로 확대했다. 서용하 시피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인해 ‘빛은 무지개’ 편을 기획한 건 아니지만, 그러한 가이드라인이 (제작) 자율성을 폭넓게 보장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데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한 사유리씨 모습. 방송 예고 영상 갈무리
예컨대 정자 기증을 받고 비혼 출산을 선택한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씨의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 출연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 쪽 모두 서울 여의도에 있는 한국방송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차별금지법 등 사회적 합의가 제도적으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 집단의 조직적 활동은 제작 자율성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지난 3월 시작된 ‘사유리씨 방송 출연 반대’ 시청자청원도 총 4415명의 동의를 받아, 제작진 답변이 의무화됐다. 강봉규 예능제작센터 예능6시피는 지난 4월 공개 답변에서 “한부모 가구 비율은 7.3%로 급증하고 있으며 기혼 가구에만 지원되던 가족 정책도 다양한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 방송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언론연대) 사무처장은 “최근 한국방송의 한 아나운서가 남편에게 속아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시청자 사연에 대해 ‘임신은 축하할 일’이라며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발언을 해서 사과하는 등 부족한 부분이 여전히 있지만, 과거에 견주면 다양성 확보를 위한 노력이 한층 두드러져 보인다”고 말했다. ■ 넷플릭스는 업계 최초로 ‘다양성 보고서’ 학계에선 공영방송이 다양성·창의성을 주요 목표로 추구할 경우 민영방송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쳐서 전체 사회의 방송 문화가 나아진다는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를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다양성 통계 조사’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조치를 취한 건 공영방송이 아닌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기업 ‘넷플릭스’였다. 올해 초 넷플릭스는 업계 최초로 외부 연구팀과 함께 젠더·인종·성소수자·장애 등을 기준으로 제작진 및 콘텐츠 등장인물의 다양성 현황을 살핀 보고서를 공개했다. 조사 결과, 넷플릭스는 미국 업계 평균보다 다양성을 갖췄지만, 실제 인구 대비 백인·비장애인 등이 과다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 뒤 넷플릭스는 다양성 조사를 주기적으로 시행하고, 다양성 강화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정책 수립에 참조하고자 미디어다양성 조사를 실시해왔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수행한 ‘2019년 미디어다양성 조사’ 보고서를 보면, 공영방송을 포함한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등 유료방송 사이에 성별·연령·직업·장애를 기준으로 한 다양성 구성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배진아 공주대 영상학과 교수는 “한국방송이 공영방송으로서 ‘승수효과’를 보여주는 역할을 충분히 했으면 한다”며 “이를 위해 스스로 다양성 가치를 정의하고, 구현 정도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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