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명과 암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그 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다. 이를 두고 굳이 형이상학적 상징을 상상하지 않더라도, 어둠은 말 그대로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소들, 대표적으로 범죄와 맞닿아 있다면 밝음은 덮인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더 큰 힘으로 귀결된다.
그런 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법과학자 정희선 석좌교수,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이다.
정희선 법과학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고,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서 한국인 최초로 국제과학수사 전문가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마약류포렌식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다. 현재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7월 1일 자로 성균관대학교 과학수사학과 석좌교수로 초빙되었다.
이렇게 굵직한 커리어 외에도 다 나열하기 힘든 그의 이력은 역시 ‘법과학’을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지금의 정희선을 있게 한 곳’ 국과수와 과학수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들어봤다.
국과수, ‘밝은 세상을 꿈꾸며 사회의 어두운 조각들을 수집하는 곳’
“과학수사야말로 옳음과 그름, 이원대립 사이의 모호성에서 분명한 지표 역할을 합니다. 결국 과학의 역할이란 사람을 위한 것이니, 과학수사도 유죄 또는 무죄를 입증하여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국과수에서 처음으로 맡은 일은 ‘가짜 꿀’ 판별이었다고 한다. 샘플로 받은 꿀 속에 설탕, 물엿, 포도당, 과당 등 불순 물질을 걸러내어 가짜 꿀을 판별하는 일.
이렇게 얻은 결과를 통해 가짜 꿀을 제조, 유통, 판매하면서 이익을 편취한 사람들을 수사·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만족도도 높았지만, 무엇보다 사회와 국가에 기여했다는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과학수사는 말 그대로 과학의 힘으로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증거를 분석하여 모호성을 상쇄시키고, 유죄 또는 무죄를 입증하는 객관적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법과학자로 34년간 몸담았던 국과수의 일은 개인의 직능 이상의 무게감이 필요하지만, 그 결과가 사회에 영향력을 보일 때의 희열은 개인적 차원 그 이상이었다고 정 회장은 회상했다.
그래서 그의 저서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는 사람들’ 서문에는 “밝은 세상을 꿈꾸며 사회의 어두운 조각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풀어가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과학수사, 한 걸음 더 나아가 4차산업기술과 만나다.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은 ‘살인의 추억’으로 회자되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아닐까. 정 회장은 그때에 비해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기술과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고 힘주어 말했다.
“과학수사의 위상을 높인 건 세 가지 요소로 꼽을 수 있어요. 첫째는 최신 장비를 과학수사에 활용하게 된 것. 둘째는 실험 방법과 결과 데이터의 표준화로 오독 및 오류를 줄인 것, 마지막으로는 맨 파워, 즉 우수한 인력들이 공급되었다는 겁니다.”
과학수사는 다양한 학문과 기술이 융합하여 최고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특정 분야만의 독주로는 지금의 위상에 다다를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특히 4차산업기술은 과학수사의 급성장을 견인하였다고 평가했다. 일례로 개인식별을 위해 활용되는 유전자분석은 ‘유전자 빅데이터 DB’, ‘딥러닝을 통한 스크리닝’, ‘AI를 통한 유전자 매칭’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4차산업 핵심기술의 수혜를 톡톡히 받고 있다.
과학수사는 분석의 정교성과 증거자료의 시의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4차산업기술이 과학수사에 미칠 영향은 더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덧붙였다.
과학은 사람을 위한 사람의 일
정희선 회장은 현재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여성과총) 10대 회장을 맡고 있다. 여성과총은 생명과학, 의학, 환경, 에너지를 비롯하여 젠더 불균형이 심한 건설 및 정보기술 분야를 총망라하는 69개 단체(총 회원 수 7만 6000명)의 연합회다. 정 회장은 여성과총의 핵심 비전은 “여성과학자의 역량 개발과 고용 평등”이라고 설명하면서, 이에 덧붙여 본인의 재임 기간에 꼭 지키고 싶은 포부를 밝혔다.
“정교한 실험과 연구는 과학자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연구를 위한 연구 혹은 연구의 결과로만 남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에서 연구 분야는 과학자의 몫이지만, 국민들의 몫이 분명히 있습니다. 과학의 정수와 지식은 결국 국민들에게 전달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여성과총 회장 재임 기간 내내 사회 연계(public engagement)를 실현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정 회장는 인터뷰 내내 ‘사회를 위한 일’을 강조했다. 법과학자로서 과학의 역할을 체감하고, 여성과총 회장을 맡으면서 시대적 사유과 고민을 한 그가 내는 진솔한 목소리였다.
일반인들에게 과학은 여전히 진입장벽이 높은 전문 분야이다. 그러나 ‘과학은 사람을 위해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통해 대중과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다.
다행히 여성과총과 회원 단체의 다양한 활동이 사회 곳곳에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아직까지 극복해야 할 국가 정책 및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이 있지만, 그는 수적천석(水滴穿石), 물방울이 결국 돌을 뚫는다는 집념과 의지, 그리고 사람의 힘을 믿는 게 분명해 보였다.
정희선 회장은 인터뷰 마지막에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운을 뗐다.
“과학은 ‘왜(Why?)’라는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견디는 집념이 없었다면 지금의 과학기술은 결코 이뤄질 수 없었을 겁니다. 일도 마찬가지예요. 끈기와 집념을 가지고 일을 대하면 어떤 일이든지 매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 입구에서 나무 몇 그루 보고 겁을 내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서 숲을 보는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12)
July 07, 2020 at 06:24AM
https://ift.tt/2C8kzHs
“과학은 사람을 위한, 사람의 일”…과학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다 - Science Times
https://ift.tt/2YvWrWy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과학은 사람을 위한, 사람의 일”…과학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다 - Science Times"
Post a Comment